1. 우주의 태동과 첫 빛의 흔적
빅뱅, 팽창, 온도, 흔적이라는 네 단어를 먼저 세워 둔다. 우주의 시작을 말할 때 이 네 단어가 길을 밝혀 준다. 우주는 아주 뜨겁고 빽빽하던 때에서 출발해, 시간이 흐르며 점점 식고 넓어졌습니다. 우리가 밤하늘에서 보는 별과 성운, 은하의 수많은 점들은 그 긴 식힘과 펼쳐짐의 뒤늦은 소식입니다. 과학자들이 우주의 첫 기척을 말할 때 자주 꺼내는 증거는 ‘우주배경복사’입니다. 이 빛은 우주가 아직 젊고 뜨겁던 때에 풀려난 빛으로, 지금은 아주 차갑고 약한 미세한 속삭임처럼 남아 있습니다. 하늘 어디를 향해도 거의 같은 온도로 들려오는 이 속삭임은, 우주가 한때 고르게 가득 차 있었음을 말해 줍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멀리 있는 은하의 빛이 늘어나 붉어져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빛의 물결이 늘어난다는 말은 곧 우주 자체가 넓어지고 있음을 뜻합니다. 풍선 표면에 찍은 점들이 풍선이 부풀 때 서로 멀어지는 모습과 비슷합니다. 이 두 가지 흔적, 차갑게 식은 배경빛과 늘어나는 빛의 물결은, 우주가 한 지점에서 폭발하듯 터졌다는 뜻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모든 곳에서 함께 팽창해 왔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따라서 ‘시작’은 특정한 방향이나 장소가 아니라, 모든 곳의 옛날 모습에 깃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배경빛을 듣고, 멀리서 붉어진 빛을 본다면, 그것은 바로 이 자리에서 우주의 어린 시절을 만나는 일과 같습니다. 더해, 어린 우주에서 만들어진 가벼운 원소의 비율도 단서를 줍니다. 수소와 헬륨, 아주 조금의 리튬이 초기에 어떤 비율로 태어났는지 계산한 값이, 실제 별과 구름에서 측정한 값과 잘 들어맞습니다. 만약 우주가 늘 지금과 같은 상태였다면 이런 고른 비율이 자연스럽게 생기기 어렵습니다. 배경빛의 온도 또한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절대온도 약 3도 남짓한 차가운 빛이 하늘 전체에서 거의 같은 세기로 들려옵니다. 이처럼 서로 다른 증거가 한 방향을 가리킬 때, 우리는 ‘처음’이라는 말에 훨씬 단단한 뜻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2. 팽창이 말하는 시간표
시간, 거리, 붉어짐, 온도라는 낱말을 붙잡고 우주의 시계를 읽어 본다. 우주가 팽창한다는 말은 단지 크기가 커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팽창은 곧 시간표이기도 합니다. 공간이 넓어질수록 빛의 물결은 늘어나고, 모든 물질의 평균 온도는 내려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늘의 온도와 빛의 붉어짐 정도를 재어 과거의 장면을 되짚습니다. 가까운 곳의 은하는 덜 붉고, 먼 곳의 은하는 더 붉습니다. 이 간단한 경향만으로도 ‘먼 곳을 볼수록 오래전의 우주를 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씩 더 먼 곳을 바라볼수록, 우리는 별이 태어나기 전의 희미한 구름 시절, 그리고 별빛이 처음 켜지던 첫 새벽을 향해 거슬러 갑니다. 팽창의 시간표는 또한 구조가 자라는 느린 과정을 보여 줍니다. 처음에는 고른 듯 보이던 물질이 아주 미세한 차이를 씨앗으로 삼아 점점 모였습니다. 조금 더 많은 곳은 더 빨리 끌어모으고, 조금 덜한 곳은 더 비어 갑니다. 이런 작은 차이의 증폭이 오늘날의 별, 은하, 은하단으로 자라났습니다. 우리는 하늘 지도를 넓혀 보며, 한 덩어리의 무늬가 실타래처럼 길게 이어져 있는 모습을 봅니다. 엉겨 붙은 매듭은 은하단이 되고, 그 사이의 비어 있는 큰 틈은 우리가 흔적을 덜 받는 지역입니다. 팽창이 계속되는 한 이 큰 무늬는 더 느리게, 그러나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따라서 오늘의 하늘은 과거의 시간표 위에 놓인 현재의 한 칸일 뿐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그 칸을 또렷하게 기록하고, 이웃한 칸과 연결 지어 이야기의 흐름을 읽는 것입니다. 늘어나는 사이에 식고, 식는 동안에 무늬가 살아납니다. 그 사실을 알면, 끝없이 멀어지는 우주 안에서도 길을 잃지 않습니다. 팽창의 속도는 하나의 숫자로 끝나지 않습니다. 가까운 이웃을 잴 때와 먼 과거를 잴 때 방법이 달라지며, 서로를 비추어 보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천문학자는 여러 자를 이어 붙입니다. 가까운 별에서는 위치가 조금 달라져 보이는 변화를 자로 삼고, 더 먼 곳에서는 밝기의 표준이 되는 별무리를 이용하며, 그보다 먼 곳에서는 은하 전체의 빛을 비교합니다. 이렇게 계단처럼 잣대를 쌓아 올리면, 붉어짐과 밝기, 온도가 함께 춤을 추듯 한 그림으로 모입니다. 시간표가 이런 식으로 여러 증거를 통해 서로 확인될 때, 우리는 현재가 어디쯤인지, 과거가 어떤 속도로 흘렀는지 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3. 작은 실험으로 그리는 큰 지도
망원경, 배경복사, 은하, 관측이라는 네 낱말을 먼저 적어 둔다. 우주의 역사는 거대한 이론으로만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실험이 모여 그려진 지도이기도 합니다. 도시의 불빛이 잦아들 때 높은 언덕에서 하늘을 오래 바라보면, 눈에 보이는 점뿐 아니라 점들 사이의 빈 곳이 말 걸어 오는 순간이 있습니다. 천문학자는 그 빈 곳까지 기록합니다. 배경복사의 온도를 더 정밀하게 재고, 은하들의 위치를 넓은 구역에 걸쳐 모아 하나의 지도로 엮습니다. 빛이 늘어나는 정도를 별과 은하마다 비교해, 멀고 가까움을 가늠합니다. 이때 중요한 태도는 복잡한 말보다 반복과 검증입니다. 같은 영역을 다른 밤에 다시 보고, 다른 기구로 다시 잽니다. 낮에는 측정기를 손질하고, 밤에는 노출 시간을 길게 잡아 약한 빛을 묵묵히 모읍니다. 한 장의 사진에는 수많은 밤의 인내가 쌓입니다. 이렇게 모인 자료를 함께 놓고 보면, 하늘의 무늬가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은하는 무리지어 다니고, 무리는 더 큰 무리로 이어집니다. 배경빛의 미세한 울퉁불퉁함은 오늘의 거대한 구조와 잇닿아 있고, 그 사이사이의 빈틈은 장차 별이 태어날 자리를 약속하듯 비어 있습니다. 작은 실험은 사람들의 삶과도 닮아 있습니다. 같은 길을 여러 번 걸어야만 보이는 표지판이 있듯, 같은 하늘을 여러 번 찍어야만 드러나는 자취가 있습니다. 우리는 작은 망원경, 작은 안테나, 작은 노트에서 시작해, 큰 지도를 조금씩 완성합니다. 크다고 해서 위대하고, 작다고 해서 보잘것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주 이야기는 작은 성실이 모여 만든 큰 길이며, 오늘 우리가 적는 한 줄의 관측 기록도 먼 훗날 누군가의 길잡이가 될 수 있습니다. 더 넓은 하늘을 보기 위해 사람들의 힘이 모이기도 합니다. 밤하늘 사진을 나눠 맡아 점과 얼룩을 분류하는 시민 참여 연구는, 작은 눈들이 모여 큰 지도를 만드는 좋은 본보기입니다. 관측 기록에는 언제, 어디를, 얼마나 오래 보았는지와 함께 흐린 하늘, 바람, 기기의 미세한 흔들림 같은 조건도 곁들여 적습니다. 이런 사소해 보이는 정보가 데이터의 참뜻을 살려 줍니다. 우리는 성공한 사진과 실패한 밤을 함께 쌓아 하나의 지식으로 묶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큰 지도는 어느 한 연구자의 이름이 아니라, 오래 기다린 수많은 손의 노고를 담은 공동의 산물입니다.
출처: 한국천문연구원 우주론 기초 자료, 국립중앙과학관 천문학 해설, 미국항공우주국(NASA)·유럽우주국(ESA) 교육 자료